(서울=연합인포맥스) "펀드매니저와 얼룩말은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둘 다 아주 특별하지만, 성취하기 어려운 목표를 갖고 있다. 펀드매니저는 시장 평균보다 높은 수익률을 올리려 하고, 얼룩말은 신선한 풀을 먹으려 한다. 둘 다 리스크를 싫어한다. 펀드매니저는 잘못하면 '잘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고, 얼룩말은 사자에게 '잡아 먹히기' 때문이다. 둘 다 무리 지어 움직인다. 이들은 생긴 것도, 생각하는 것도 비슷하며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미국의 전설에 가까운 투자자 중 한 명인 랄프 웬저가 쓴 'A Zebra in Lion Country'라는 유명한 책의 일부분이다. 그는 소형주 위주 투자펀드를 설립해 기록적인 수익률을 냈고, 국내에서 이 책은 '작지만 강한 기업에 투자하라'로 출간됐다.

최근 몇 년 동안 가득 차 있던 자신감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지금, 이 말 만큼 내년 한국경제에 대해 호소할 수 있는 문구가 있을까. 사자 왕국의 얼룩말 신세인 한국이 글로벌 투자자에 '한국에 투자하라'고 설득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매년 그랬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금융시장이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환경이 국내 금융시장에서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다. 취약한 한국 주식, 원화, 국채가 톱티어를 향해 한 발짝 나아가고 있었다가 무언가에 확 걸린 것 같은 올해는 특히 더 그랬다.

펀드매니저와 처지가 같다는 얼룩말. 먹이사슬 최하위에 있는 얼룩말은 무리에서 어느 곳에 자리를 잡을지에 따라 운명이 달라진다. 주변 환경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최상의 자리는 무리 맨 바깥쪽이다. 신선한 풀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지만, 이 무리는 사자의 공격에 가장 먼저 노출된다. 반면 무리의 안쪽에 자리 잡으면 제대로 풀을 먹지 못하지만, 사자가 바깥쪽 얼룩말을 공격할 때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다.

얼룩말
[촬영 안 철 수] 서울어린이대공원 동물원

중간 어디쯤 있으면 좋겠지만, 세상일이 그리 쉽지 않다. 한국경제도 체력으로는 선진국 그 이상이었지만, 자본시장으로는 신흥국에 있었던 과거, 퀀텀 점프를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9일, 국내 자본시장은 본격적으로 신선한 풀을 뜯으러 나갔다. 우리나라 국채는 세계국채지수(WGBI)에 편입됐고, FTSE 선진국 지수에서도 밀려나지 않았다. 이는 몇 년간 반짝 노력해서 얻은 결과물은 아니다. 오랜 기간 그걸 지켜봐 온 사람은 말한다.

"정말 오랜 기간 노력했고, 매번 안됐기 때문에 '되는 게 대단하지 안 되는 게 이상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아보면 아찔하다.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사태 등을 보면서 올해, 이 성과가 없었다면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어디로 갔을지 상상하기조차 싫다"

그가 얘기한 것처럼 아찔한 순간이다. 이런 뜻밖의 선물에도 코스피는 2,400 밑에서 올해를 마쳤다. 지수는 7월부터 6개월 연속 하락했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16년 만에 최장 하락 기록을 세우게 됐다. 달러-원 환율은 1,472.50원으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27년 만에 연말 종가 기준으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크레디트라고 할 만큼 자본시장에서 한번 잃어버린 신뢰는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레고랜드 사태로, 짧았지만 국내 금융시장 전반이 위축됐던 기억이 불과 2년 전이다. WGBI에 들어가지 못하고, FTSE 선진국 지수에서 강등됐더라면….

정말 예상하지 못한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또 권한대행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에 부닥쳐있을수록 '우리는 다르다, 우리의 펀더멘털을 봐주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쌓은 '트랙 레코드'보다 지금은 '우리를 선입견 없이 봐달라'가 맞을 수 있다.

우리는 정성적 리스크를 너무도 간과했다. 뒤늦게 반성문을 써보지만, 사실 정성적 리스크는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이다. 다만 정량적 리스크만큼은 그래도 안전지대라 말하고 싶다. 사자 왕국의 얼룩말이 내년에는 배불리 먹을 수 있길 기대해본다. (금융부장)

sykwa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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