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세기의 만남이라고 하는 순간들을 되짚어보면 당시에는 딱히 어떤 의미를 짚어내기 쉽지 않지만, 후대에서 되새겨 볼 때 새로운 의미가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20일 회동한다. 한 사람은 국내 최고 기업의 총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국회 원내 다수당의 대표이자 유력 대선주자다.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시선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두 사람의 만남에 여러 가지 해석이 붙을 수 있다. 재계와 정계의 유력자이면서도 법원의 문턱을 자주 드나들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그런 상황이 같은 사람으로부터 비롯됐다는 사실까지. 성장 배경으로는 너무나 다른 두 사람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호사가들한테는 좋은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삼성 총수와 유력 정치인의 만남. 60여년의 세월을 되돌려 보면 우리 역사에는 이미 비슷한 장면이 등장했다. 1961년 5월 16일 당시 군 소장이던 박정희가 일으킨 군사쿠데타 직후 삼성의 호암 이병철 회장은 부정 축재자 1호로 지목돼 호텔에 연금됐다. 서슬 퍼런 군부 일인자 앞에 끌려간 호암 회장은 어떤 이야기든 기탄없이 해달라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의 요청에 "부정 축재자로 지칭되는 기업인에게는 사실 아무 죄도 없다고 생각한다"고 대담하게 말했다.
호암 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 말을 했을 당시 박정희 부의장의 표정이 일순 굳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호암 회장은 수익 이상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세제의 불합리성 등을 막힘없이 언급했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박 부의장의 질문에는 기업인을 부정 축재자로 몰 게 아니라 경제건설의 일익을 담당하게 해달라 했다고 제안했다.
두 사람의 만남 이후 서대문 형무소 등에 구금됐던 재계 총수들은 모두 풀려났다. 이후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성장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모두가 아는 바다.
다시 시간을 현재로 돌려 오늘 만나는 두 사람의 처지를 살펴보자. 이재명 대표는 정치인으로서 비상계엄으로 어수선해진 사회를 바로잡고 곤두박질한 한국 경제를 다시 일으켜야 하는 과제가 있다. 이재용 회장은 불완전한 삼성의 지배구조를 해소함으로써 본인과 삼성을 옭아매는 굴레를 벗어나야 한다. 삼성물산, 삼성생명, 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지배구조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법률적 뒷받침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재용 회장 일가의 삼성 그룹 지배에 대한 한국 사회의 동의, 최소한 묵인이 있어야 한다. 이재용 회장이 가지지 못한, 정치적 자산이 필요한 부분이다.
한 번의 만남으로 어떤 일이 이뤄지지는 않을 것이다. 정경유착에 대한 우려들이 해소되지 않는 나라에서 재계 총수와 다수당 대표, 그것도 대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유력 대선후보의 만남이 곱게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상상을 해보는 이유는 하나다. 현 국면이 대한민국이 위기이고 삼성전자가 위기이기 때문이다. 이재용 회장의 할아버지는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삼성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본인의 숙명'이라고까지 불렀던 한국비료공업(한비)을 국가에 헌납했다. 세계 최대 규모의 공장을 국가에 헌납한 이 사건을 회고하며 호암 회장은 "나의 생애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쓰디쓴 체험"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그는 위기를 벗어났고 '한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삼성전자라는 세계적인 기업을 후대에 남길 수 있었다.
궁변통구는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표현이다. 다하면(窮) 바뀌어야(變) 하고, 바뀌면 이어지고(通), 이어지면 오래(久) 갈 수 있다. 지금이 위기인가. 그렇다면 변화해야 한다. 그러면 이어지고 다시 오래갈 수 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위기의 대한민국에 변화를 가져오는 순간으로 후대에 기억되기를 희망한다.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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