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우리 정부가 가장 뼈아프게 느껴야 할 것은 지난 10년간 새 산업이 도입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 산업을 도입하려면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고 누군가는 고통받아야 하는데, 사회적 갈등을 감내하기 어려워 다 피하다 보니 새 산업이 하나도 도입되지 않았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정부의 뼈를 제대로 때렸다. 지난달 금융통화위원회 기자간담회에서 이 총재가 한 말이다. 정부가 할 일이 있고, 중앙은행이 할 일이 있는 거지만 누가 봐도 '맞말'이라 선을 넘었다는 지적을 하기도 어렵다. 얼마나 나라 경제가 답답하고 걱정됐으면 통화정책 수장인 한은 총재가 이런 말을 했을까. 이 총재는 "수년간 구조조정 없이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산업을 육성하지 않은 탓에 주요 수출 업종의 경쟁력은 떨어졌고, 노동력도 고령화하고 있어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은 어렵다"면서 다시 한번 산업 구조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국의 산업 구조개혁은 해묵은 과제다. 반도체와 자동차, 철강, 조선, 화학 등의 주력 산업 포트폴리오는 수십 년째 변함이 없다. 지금도 반도체 업황이 흔들리면 한국 경제가 곧바로 타격을 입는다. 이 총재의 걱정대로 새로운 성장동력이 돼야 할 첨단기술 산업 비중은 매우 낮다. 인공지능(AI) 시대가 불어닥치자 우리 산업 구조의 한계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미국의 AI모델 연구기관인 에포크AI가 작년에 내놓은 자료를 보면 전 세계 주목할 만한 AI 모델에 한국의 AI는 '제로'였다. 과거 기술 강국, IT 강국의 면모는 이제 찾아보기 어렵단 한탄이 쏟아진다.
정부가 책임져야 할 산업정책은 사실상 실종됐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출범으로 미국발 관세 폭탄 우려가 현실화하고 있지만, 눈에 띄는 대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시로 점검회의는 열리는 것 같은데 나오는 내용은 한결같다.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선제적으로 시나리오별 종합 대응방안을 검토하겠다는 식이다. 하나 마나 한 얘기들이다.
산업 구조개혁의 첫발은 규제 완화에서 출발한다. 특히 AI와 자율주행, 로봇 등 첨단기술 산업을 키우려면 불필요한 규제부터 확 줄여야 한다. 중국 IT의 폭발적인 성장이 이를 증명한다. 중국 정부는 10년 전부터 산업진흥책 '중국제조 2025'를 기초로 강력한 자금 지원을 하면서 파격적인 규제 완화에 나섰다. 규제 완화는 AI와 자율주행, 로봇 등 실험적 분야에서 치고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는 다시 고성능 반도체와 배터리 등 기술 제조업의 발전으로 확장됐다.

산업 구조개혁이 하루아침에 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경제의 성장동력이 절실한 상황이라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구조개혁은 장기플랜으로 가져가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데, 자본시장 살리기가 가치 있는 대안이 될 수 있다.
자본시장 활성화는 기업 성장은 물론 경제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장치다. 자본시장은 기업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다양한 경로를 제공한다. 이는 다시 고용 창출과 투자 확대 등의 순기능으로 연결된다. 기업과 경제가 성장을 촉진할 수 있는 근간이다. 자본시장 활성화는 내수 살리기에도 큰 도움이 된다. 개인과 기관투자가의 '부의 축적' 효과가 경제 살리기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단 얘기다. 주가 상승 등으로 투자자들의 가처분소득이 늘어나면 소비 확대로 연결되는 게 일반적이다. 주가가 오르면 수출 기업은 투자를 위한 자금조달이 용이해지고, 내수 기업은 소비 확대에 따른 직접적인 혜택을 받게 된다. 코로나 팬데믹 시절 우리 경제와 기업, 가계 등 경제 주체까지 비교적 풍요로웠던 건 이런 주가 상승기 덕분이다.

상법 개정을 둘러싸고 정치권 논리 싸움이 첨예하지만, 자본시장 활성화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 답은 간단하다. 재계와 여당의 주장대로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안은 기업 의사결정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다. 기업의 목줄을 죄는 법안이 될 것이란 과격한 주장도 나온다. 다만, 그동안 기업이 지배주주(회사) 이익을 위한 의사결정에만 집중해온 부작용을 더는 방치해선 안 된다.
이번 상법 개정은 기본적으로 주주의 이익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투자자 입장에선 신뢰의 문제가 걸려 있는 셈이다. 주주 이익이 보호된다는 신뢰가 쌓여야 국외 자금과 국내 자금 모두 안정적으로 유입될 수 있다. 그동안 우리 자본시장의 고질병이었던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라는 차원에서 보면 상법 개정을 마냥 반대하는 것이 최선인지는 의문이다. 경제 살리기의 큰 틀에서 보면 정치 논리가 개입될 틈이 없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 (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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