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태국에서 시작된 바트화 위기가 우리나라에 옮겨붙던 1997년 10월,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인 부즈앨런 앤 해밀턴은 한국 경제를 넛크래커 속의 호두에 비유한 보고서를 냈다. 한국이 기술에서는 일본에 밀리고, 가격에선 중국에 밀리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 핵심이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도 없는 명제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 산업이 맹아기였던 탓에 콧방귀를 끼는 이들이 많았다. 당면한 외환위기 극복이 우선이지, 산업의 큰 그림에 대해선 기업도 당국자도 관심이 없었다.

외환위기를 극복하고 벤처 열풍이 일면서 우리 경제는 드라마틱한 회복을 했고, 증시에서 유동성 잔치를 벌이는 사이 넛크래커론도 기억 속에서 시나브로 사라졌다. 넛크래커 이론이 부활한 것은 중국이 비약적인 성장을 한 2000년대 후반이다. 가격 경쟁력에 기술이 더해져 우리 기업들을 위협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물론 현대차의 정몽구 회장도 중국의 부상에 위협을 느끼며 우리 경제가 위아래로 치이는 샌드위치 신세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렇지만 이때 우리 경제도 5~6%대의 성장률을 유지했고, 수출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며, 세계경제 톱10 국가로 진입을 꿈꾸던 때라 샌드위치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속내엔 '중국이 많이 컸다곤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이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이 많았다.

 

  

한중 첨단산업 수출경쟁력 지표 추이

  그로부터 10여 년이 또 흘렀고, 2025년 현재 넛크래커 속의 호두는 현실이 됐다. 화학, 철강 등 중후장대 산업은 이제 중국에 시장을 빼앗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첨단기술에서도 중국의 약진은 두드러진다. 휴대전화를 비롯한 각종 전자제품은 물론 반도체, 5G 통신, 전기차 등에서도 한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왔다. 중국의 반도체 업체들의 저가공세는 삼성전자의 실적을 갉아먹고 있다. 해외 반도체 전문가들은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의 비약적인 성장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은 "삼성전자가 고가 시장에선 미국 마이크론에 밀리고, 저가 제품 시장에선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에 치이는 상황"이라 지적했다.

한국 시장 진출을 선언한 샤오미의 휴대전화와 전기차 BYD는 중국의 기술발전을 상징하는 단면이다. '대륙의 실수'라는 조롱이 한국 시장 공략이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BYD의 상륙에 현대차는 선제적인 전기차 할인판매로 맞대응을 시작했다. 딥시크에 일격을 당한 인공지능(AI) 분야에선 우리가 추격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https://youtu.be/p3G4hNs73vs?si=Nv2Mj06nW7n_OQJ8

만시지탄(晩時之歎) 같지만, 지금이라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넛크래커를 극복하려면 기술에서 중국에 무조건 앞서야 한다는 게 기본 명제다. 중국은 국가적으로 산업을 지원해왔다. 제조업 2025라는 비전 아래 국가적으로 산업을 밀어주고, 인재를 양성했다. 우리가 그런 나라와 맞서 싸우려면 그 이상을 해야 한다. 벼랑 끝에 몰렸을 때 생존을 모색하는 한국 기업의 DNA가 빛을 발하도록 도와야 한다.

기업들이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도록 지원해도 모자랄 판에, 반도체 특별법은 주 52시간 근무제 이슈 때문에 아직도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정체는 곧 퇴보인 글로벌 생존경쟁에서 우리 스스로 발목을 잡는 행태가 계속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편집해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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