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충실의무 도입만도 역사전 진전…성급하면 부작용 우려"
"투기 자본이 견실한 이사회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도"
(서울=연합인포맥스) 이규선 기자 = 최근 국회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에서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제외된 것이 오히려 적절한 결정이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주주에 대한 이사의 충실 의무가 도입된 것만으로도 역사적 진전이며, 집중투표제까지 동시에 추진했다면 기업 경영에 혼란을 초래하고 장기적 기업가치를 훼손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엄수진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7일 '상법개정,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빠져서 반쪽짜리라구요?' 보고서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최근 본회의를 통과한 상법 개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 포함 ▲감사위원 분리선임 시 합산 3% 의결권 제한 규칙 적용 ▲전자주주총회 도입 등을 골자로 한다.
엄 연구원은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가 명시된 것만으로도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한 역사적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빠진 것에 대한 일각의 비판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만일 주주 충실 의무 도입과 함께 집중투표제 의무화까지 포함됐다면 소수주주 권익을 지나치게 앞세우다 기업 경영의 혼란과 경쟁력 저하를 야기하는 '알묘조장(곡식의 싹을 뽑아 성장을 돕는다)'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소액주주 연대가 추천한 이사가 전문성보다는 독립성만 갖췄을 경우 기업의 장기 사업 계획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다.
또한 엄 연구원은 현행 제도하에서도 이사회가 효과적으로 운영된다면 주주 추천 이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사회가 지배주주로부터 독립적이고, 개정된 상법에 따라 주주에 대한 충실 의무를 잘 이행한다면 굳이 주주가 추천한 이사가 이사회에 포함될 필요는 없다"며 "사외이사나 감사위원회 제도가 효과적으로 운영된다면 주주의 직접적인 경영 관여는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엄 연구원은 '소수주주 대(對) 이사회'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벗어나 규제 개혁의 궁극적 목표가 '기업가치 제고'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규제 개혁은 특정 이익집단을 두둔하려는 것이 아니다"라며 "집중투표제는 경우에 따라 단기 차익을 노리는 투기 자본이 견실한 이사회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도 있다"고 경고했다.
마지막으로 행동주의 펀드가 추천한 이사가 오히려 '이사의 충실 의무'를 위배할 수 있다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엄 연구원은 "행동주의 펀드 측 이사는 자신이 속한 펀드와 대상 회사 사이에서 이해상충에 놓일 수 있다"며 "이는 이사로서 부담하는 선관주의의무나 충실의무와 정면으로 상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또한, 이사회 활동 과정에서 취득한 기밀 정보를 펀드에 제공할 경우 비밀유지의무 위반이 성립할 수도 있다.
그는 "집중투표제를 의무화하기에 앞서,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충실 의무 위반 문제에 대한 충분한 논의와 보완책 마련이 선행되어야 한다"며 "그런 의미에서 주주 충실 의무 도입과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한 번에 추진하려던 것은 다소 성급한 시도였을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kslee2@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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