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
인텔(INTEL, Integrated Electronics)의 초대 회장은 무어의 법칙을 탄생시킨 고든 무어, 집적회로(IC, Integrated Circuits) 개발의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한 로버트 노이스도 아닌 벤처캐피털리스트 아서 락(Arthur Rock)이었다. 미국 실리콘밸리 반도체 신화의 주인공들 중에는 무어와 노이스 같은 엔지니어도 있지만, 반드시 필요한 모험자본(Entrepreneurial Capital) 즉, 돈을 끌고 왔던 금융인도 빼놓을 수 없다. '쩐주'는 아니지만, '딜 메이커(Deal Maker)'다.
벤처펀드. 요즘엔 대중에 흔하게 알려진 이름이다. 열정과 기술은 있지만 돈이 없어 꿈을 실현하지 못하는 기업인과 임직원에게 생명줄과 같은 자금원이다. 하지만 이 냉혹한 세상에 성공은 드물다. 1천개 중 1개 만이 '신화'를 쓴다. 천재들을 발굴하고, 그들에게 자신의 재능을 무한으로 펼칠 수 있게 해야만 한다. '전인미답'의 길을 걸어야만,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벤처, 혁신기업을 위한 수많은 대출, 투자 정책이 마련되었건만, 가뭄에 콩 나듯 '대어'가 솟아나는 까닭이다.

아서 락은 1961년 뉴욕의 증권회사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난 후 처음으로 스타트업 투자에 뛰어들었다. 당시 유행했던 미 연방정부의 (혁신)중소기업투자회사(SBIC, Small Business Investment Company) 지원 프로그램으로 스타트업 투자에 나선 회사들이 많았다. 매출 실적, 부동산 담보 등 과거 가치에 기반한 대출(여신)이 불가능한 기술, 지식, 인재 등 미래 가치 기반 투자가 목적이었으나, 연방정부 지원금은 연 5% 이자 납부를 요구했다.
자연히 업계는 혁신 기업이 아닌, 기존에 안정적 사업을 영위하고 있는 기업을 벤처기업으로 인증받아 대환대출 포트폴리오를 운영하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대출은 잘 상환되었으므로 연방정부 프로그램은 정례 보고서에서는 아주 잘 운영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본래 SBIC 프로그램의 취지였던 혁신기업 육성에는 그다지 돈이 투입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래서 아서 락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투자 방식을 스스로 고안해냈다. 현대 벤처투자 방법론의 전범(典範)을 제시한 '사모투자조합(Private Limited Partnership)'이다. 고액 자산가들에게 7년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돈을 맡기면 고수익을 내주겠다는 약속하에 투자금을 모집했다. 이자도 없고 원금 보장도 없었다. 실패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과감한 지분 투자였지만, 전자 기술에 정통한 그는 '선수'를 알아보는 데 도가 튼 전문가였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전화기를 돌린 끝에 자신을 믿고 돈을 태운 투자자 즉, 유한책임파트너(LP)의 수는 서른 명 남짓. 아서 락은 그들과 함께 자신의 돈까지 넣어 노이스, 무어와 인텔을 창립했다. 창업 아이템이었던 디램(DRAM)은 물론, 투자 방식 역시 혁신을 이뤄냈다. 진정한 실리콘밸리의 힘이 분출되기 시작한 계기였다. 모험 투자 방식의 '수레바퀴'가 발명된 순간이다.
# 1983년.
삼성그룹 창업주 호암(湖巖) 이병철은 '도쿄선언' 이후, 반도체 사업으로 흑자를 보지 못한 채 폐암으로 별세했다. 좋게 말하면 누구도 반도체 투자 결정을 환영하지 않았다. 보다 현실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이 회장이 드디어 노망이 났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그의 임종을 기다리며 반도체 사업 철수를 논의하던 임원진도 많았다.
기술적 난이도뿐 아니라, DRAM 시장의 치킨게임, 미일 관계를 중심으로 한 국제정치 관계 등 호암의 결단은 오늘날 되짚어 보면 탁견이었다. 그는 과연 당대 급변하던 국제정세와 시대를 읽었던 것일까.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렵다. 하지만 10년, 15년 후에는 삼성전자가 세계 1등이 될 것이라는 비전 없이 그룹과 일가의 명운을 걸고 베팅을 걸 수 있었을까. 분명한 건, 그는 고독했다.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은 호암의 타계 한 달여 전 어느 가을날, 반도체 기술원에 들러 대한민국 미래 세대의 먹거리 마련을 위해 반도체 사업에 투자했다는 그의 육성을 기억하며 눈물을 보인 바 있다. 폐암 말기의 중노인이 마지막 나들잇길에 계단 3개를 넘지 못해 쓰러져 피를 흘리며 당부한 메시지다. 자네들에게 부탁한다고 했다. 그의 부탁을, 손자는 과연 들어줄 수 있을까.
온라인카지노 사이트 벳무브 벤처투자 시장이 성장했다고 하나, 호암의 때나 지금이나 기술적으로 불가능에 가깝고 회임기간이 긴 첨단산업에 대량의 자본을 투하할 수 있는 생태계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 팹리스, 파운드리 분야에서 미국처럼 벤처캐피털이 수십, 수백조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는 여건은 지금도 기약 없는 희망이다. 곧 호암의 타계 37주년을 맞는 2024년 11월의 오늘, '기흥 밸리'의 첫 삽을 뜬 그와 동지들을 추억하는 것은, 그런 연유로 사뭇 새롭다.
# 2024년.
인텔과 삼성전자는 수난의 시기를 겪고 있다. 비난과 조소가 끊이지 않지만, 두 기업은 미국과 온라인카지노 사이트 벳무브의 생활인과 경제인들에게 한때 신화의 상징이자, '일등주의'의 증표요 '성공 DNA'의 메신저였다.
첨단의 승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기에, 지금까지 삼성전자의 시선이 향한 곳은 대개 온라인카지노 사이트 벳무브 경제의 '프론티어'였다. 디램, 낸드처럼 표준 규격 제품의 양산경쟁력을 바탕으로 성장한 삼성전자, 온라인카지노 사이트 벳무브 경제이므로 세상에 없던 신제품을 창출해 내고, 고객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까다롭고 다변화된 니즈를 충족시켜야 하는 위탁개발생산에서 고전하는 것은 충분히 예상했던 결과다.
다시 말하면, 지금 삼성전자에서 발견되는 문제들은 곧 대한민국의 여타 기업과 경제인들의 공통된 시대적 과제라고도 말할 수 있다. 과거 우리의 '성공 방정식'이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국제정세와 기술, 사회, 문화의 변곡점(Inflection Point)에 도달한 것은 아닐까. 이번 위기, 혹은 기회에 삼성전자가 다시금 변화에 실패한다면, 다른 산업, 다른 기업들은 성공할 수 있을까.
영화 '대부(The Godfather)' 3부작처럼, 조부와 손주의 시대는 다르다. 다만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은, 시대를 꿰뚫는 혜안과 리더십이다. 아서 락과 호암의 시대, 영웅적 개인의 결단으로부터 오늘날 적용될 수 있는 새로운 리더십으로의 계승과 변주, 응용과 재해석이 절실한 때다.
이제 반도체는 국가 대 국가의 싸움이다. 신 국제 질서와 분업 구조 재편의 여명이 밝아오는 지금, 우리의 법률·제도, 그리고 정책과 정부 조직 및 구성원 역시 지난 30년과는 전혀 다른 기능과 역할을 감당해야 할 변화의 시기에 마주했다. 더 이상 총수의 역량만으로 산업의 성패를 좌우할 수 없다. 미국 인텔, 대만 TSMC와 같이 전략산업 기업의 배후에는 국가가 있다. 민관이 융합된 국가 총력, '시스템 파워'가 격돌하는 전장이다.
탈각(脫殼). 껍질을 벗고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혁신(革新). 가죽을 벗겨내는 고통을 이기고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인텔, 삼성전자는 아주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안다. 이 수업료를 지불하지 않았던 30년 전의 일본을.
가보지 않았던 길을 걸어야 하는 오늘, 비로소 어두운 과거와 콤플렉스를 극복할 수 있는 갈림길에 섰다.
열강(列强)의 반열에 진입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그런 국가로 주저앉을 것인가.
한계(限界)의 돌파(突破). 삼성은, 그리고 온라인카지노 사이트 벳무브은, 과연 새로운 성공 방정식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경희권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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