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그게 우리의 실력이다"라는 언급이 경제계와 정치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 총재는 지난 25일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1.8%로 유지하기로 한 것을 두고 "세계적으로 성장률이 낮은데 우리 혼자서 성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총재는 "과거 고도성장에 너무 익숙해서 1.8%라고 하면 위기라 하는데, 우리 실력이 그 정도다"라며 "구조조정을 안 하고 기존 산업에 의존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신성장동력을 키우고 사회·경제체제를 바꿀 대대적인 구조개혁 없이 금리와 재정 정책에만 의존하면서 성장을 꿈꾸는 것은 난센스라는 지적이다. 그러면서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고 누군가는 고통을 받아야 하는 데 사회적 갈등을 피하고 싶어 누구도 나서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이 총재의 이러한 지적은 처음은 아니다. 과거 국제통화기금(IMF)에 있을 때도, 한은 총재로 와서도 구조개혁에 대한 '지론'을 여러 번 설파한 적이 있다. 지난해 '상위권 대학 지역 비례선발제'를 제안한 것도 그런 입장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과거 IMF에서 일할 때는 외국인 환자를 유치해 고용 유발 효과가 높은 의료산업을 국제화할 필요가 있다고도 했고, 청년실업을 줄이고 고령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선 노동시장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 경제의 앞날은 정부 부처를 넘어서 국회의 역할과 노력에 달려 있다고 했다.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고 보다 생산적인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종 종착역은 결국 정치라는 얘기였다.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총재의 이러한 지적에 "폐부를 찌른다"면서 "집권 여당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고 했다.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은 사실 이례적이다. 정치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물론 장기적 안목에서 국가 발전의 청사진을 그려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 대해 여당 수장으로서 사실상 고개를 숙인 셈이다. 그만큼 경제 여건이 좋지 않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현안을 두고 여야가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수직 낙하 직전의 경제 상황을 두고선 여당 수장도 냉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만을 놓고 보면 여전히 먼 나라 얘기다. 상상도 못 했던 비상계엄이 터진 지 며칠 뒤면 벌써 석 달이 된다. 헌법과 법률적 절차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정치의 양극단화는 더욱 심화하고 있다. 리더십 부재의 정부는 여전히 그대로이고, 조기 대선 가능성을 예측하는 정치권 내 싸움은 더욱 격화하고 있다.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상황만 관리하기에도 벅차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그에 따라 혹시 있을지 모를 조기 대선 가능성 등 앞으로의 정치 일정을 고려하면 현재의 정치적 불확실성은 적어도 올해 상반기 내내 계속될 것이다. 당장 민생 회복과 내수 개선을 위한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두고서도 벌써 몇 달째 논쟁만 하고 있는데 구조개혁이라니. 언감생심이다.
정부는 뭐라도 해야 한다는 압박인지는 몰라도 거의 매주 민생현안에 대한 대책들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사실 임팩트는 없다. 기존 정책들에 무언가 덧붙여 새로운 것처럼 내놓고는 있지만 눈길이 안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정부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 예산과 입법이 뒷받침돼야 하지만, 국회의 문턱은 여전히 높고, 대화와 협상의 여지는 사실상 막힌 상태이니 더 이상의 진전은 없다. 그저 경제의 숨통만 열어두는 처방만 가능한 정도다. 코로나 때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바이러스보다 정치적 불확실성이 경제에 미치는 해악이 더 크다. 현상만 유지하는 '스탠드 스틸'도 쉽지 않은 판에 큰 그림을 그려야 할 구조개혁은 저 멀리 있다.
그나마 국회에서 논의가 다시 시작된 연금개혁과 정부에서 새롭게 추진하는 첨단전략산업기금 설립에 주목한다. 여야는 연금개혁특위를 구성하기로 합의해 구체적인 사안들에 대해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모수개혁이 먼저냐 구조개혁을 병행해야 하느냐를 두고 논란이 여전하지만, 이번에는 협상을 통해 결과물을 내놓아야 한다는 입장에 여야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인 점은 긍정적이다. 사실 연금개혁의 방향과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현재로선 예측하기 쉽지 않지만, 가장 기초적인 구조개혁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크다. 연금개혁에 따라 정년 문제 등을 포괄하는 노동개혁, 그에 따른 산업구조 변경 등의 개혁 등이 줄줄이 사탕처럼 묶일 수밖에 없다.
정부는 최소 34조원 이상의 규모로 첨단전략산업기금을 산업은행에 신설해 배터리와 바이오 등 주요 전략 산업을 지원할 계획이다. 산은 등을 통한 대출 중심의 정책금융을 넘어서 별도 기금을 통해 전략산업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것으로, 불확실성이 커진 통상 환경 속에서 우리 산업의 점프업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대출 위주의 지원을 벗어나 직접투자 수단까지 마련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기업들의 부채 부담을 줄여주는 동시에 실질적인 성장 재원 투자가 될 수도 있다. 자금을 지원하는 정부(기금) 입장에선 산업구조의 점진적인 변화를 유도하면서 신성장동력으로 클 수 있는 생태계 조성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물론 기금 설립을 위한 산은 자본확충, 관련법 개정 등을 위해선 국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단순 자금 지원이 아닌 산업 구조개혁의 큰 틀에서 정부는 국회를 설득하고, 국회는 정부의 입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구조개혁은 어젠더만 던진다고 이뤄지지 않는다. 이해 당사자 간 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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