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상속세는 매우 높다, 최고세율은 50%에 육박하며, 대주주 할증이 적용될 경우 60%에 달한다. 이렇게 높은 명목세율은 지난 수십년간 유지되어 왔지만, 과거에는 최고세율을 적용받는 과세 대상의 수가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자산 가격과 물가의 상승으로 과세 대상자 및 과세액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상속세에 관한 논쟁이 가열되고 있다. 상속세율 구간은 1999년 이후 조정되지 않았는데, 물가 상승 등으로 인한 자산의 명목 가격상승을 감안하면 대규모 증세가 있었던 셈이다. 소득세율 구간도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지방자치제하에서 주민들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을 시행하는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보다 나은 정책을 시행하는 자치단체의 인구가 증가한다는 '발에 의한 투표'(voting with feet)라는 말이 있다. 과거와 달리 이제는 국가 간 거주이전도 활발하게 일어나는 만큼, 이 개념을 국가 간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한국인의 해외투자 이민이 증가하고 있다. 지금의 부유층들은 과거와 달리 해외 생활에 익숙하다. 젊어서 해외 유학을 다녀온 경험도 많고, 해외여행 경험은 더 많다. 또한 이들의 자녀 중 해외 유학이나 취업으로 이미 해외에 거주지를 가진 이들도 많다. 따라서 이들에겐 해외 이주에 대한 심리적 부담이 크지 않을 것이다. 핸리앤파트너스(Henley & Partners)라는 투자이민컨설팅업체에 따르면 미화 100만달러 이상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한국인의 해외 이주는 2025년 2천400명, 금액 기준으로는 150억달러에 달할 것이라며 이는 2022년의 400명 대비 크게 증가한 것이라고 했다. 이 업체는 한국 자산가들의 해외 이주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상속세부담을 짚었다. 이러한 자료를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 이러한 현상의 징후가 꽤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싱가포르 및 동남아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을 대상 고객으로 하는 한국인 프라이빗 뱅커(private banker)들이 늘고 있고, 해외 이주에 대한 법률 자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해외 이주 증가추세는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와 같은 자산가들의 해외 이주 수요가 환율에 주는 영향이 상당할 것이다. 자산가들의 해외 이주는 당연히 달러에 대한 수요를 늘리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2천400명이 1인당 600만달러 정도 들고 나가서 연간 150억달러 정도의 달러 수요를 만드는 것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겠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잠재적 해외 이주 욕구를 감안하면 생각보다 영향이 클 수 있다. 즉, 당장은 해외 이주 계획이 없더라도 해외 이주를 잠재적 대안 중 하나로 생각하고 있는 자산가들은 본인들의 포트폴리오에서 외화자산의 비중을 유지하거나 높이려 할 것이고, 그 수가 얼마일지는 짐작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부유한 내국인은 자산을 외화로 바꿔 해외로 이주하고, 노동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들은 본국의 가족에게 송금하기 위해 외화를 매수한다. 이것이 환율의 하단을 지지하는 큰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상속세는 민감한 문제다. 부의 대물림에 의한 불공정한 경쟁을 막고, 사회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높고 누진적인 세율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반면, 이미 소득세를 납부하고 남은 돈으로 일군 자산에 높은 세율을 부과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후손에게 부를 물려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려는 동기를 훼손한다는 지적도 또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이 문제는 결국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에 따라 합의할 문제다.
이러한 가치론과 별개로, 상속세수를 극대화하고 국내 금융시장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줄이고 싶다면, 적절한 세율에 관한 논의는 필요해 보인다. 높은 상속세를 피해 해외 이주를 택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면 많은 상속세를 걷기 위해 높은 세율을 유지하는 것이 오히려 세수의 감소를 불러올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련된 자본의 이동을 좀 더 자세히 살펴서 데이터를 모으고 이를 기반으로 의사결정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유창범 전 KB국민은행 부행장)
<저작권자 (c)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AI 학습 및 활용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