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2015년 11월 초.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경남 거제시 장평동에 있는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를 찾았다. 주요 계열사를 찾아 현장경영을 하는 것은 그룹 최고위 경영진 입장에서는 일상적인 행보다. 이 부회장의 삼성중공업 방문은 삼성전자 전무 시절이던 2007년 이후 8년 만이어서 더 관심을 받았다. 무엇보다 당시 이 부회장의 '거제行'에 눈길이 갔던 것은 삼성중공업을 포함해 국내 빅3 조선사가 심각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삼성중공업은 그동안 알짜 사업으로 꼽히던 해양플랜트 부문의 부실로 연속 적자를 내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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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산과 화학계열사를 정리해 한화와 롯데에 사업을 매각한 터라 삼성이 삼성중공업마저 버리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이 부회장의 거제 방문을 계기로 그러한 관측은 더 커졌다. 하지만 삼성의 선택은 대규모 자금 투입이었다. 9개월 뒤 지분을 들고 있던 7개 삼성 계열사는 삼성중공업에 1조1천억원의 자금을 유상증자로 대기로 결정했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금융권은 신규 대출을 꺼렸다. 살아남기 위해선 주주에게 손을 벌려야만 했다.
2016년 3분기에는 지긋지긋한 적자의 터널을 벗어나 소폭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전형적인 불황형 흑자였다. 영업이 대폭 개선된 것은 없었다. 수주가 크게 줄어 매출이 늘지 않은 상황에서 대대적인 인력 구조조정과 설비를 줄이는 방식의 고정비 절감으로 적자를 벗어난 정도였다. 여전히 힘들고 고단한 상황은 이어졌고, 인력 구조조정은 계속됐다. 일감이 없는데 대규모 고정비가 나가는 인력을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었다. 거제도를 떠나는 조선맨들은 줄을 이었다. 지역 경제는 차갑게 식어갔다.
삼성중공업이 계열사 도움으로 그나마 숨이라도 쉴 수 있던 시절, 같은 거제도에 있던 대우조선해양은 사실상 망하기 직전이었다. 대주주였던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4조2천억원의 자금을 투입하는 대신 고강도 자구계획을 추진했지만, 수주가 급감하면서 생존을 위해 대우조선이 마련해야 할 자구계획에 따른 자금 규모는 1년 새 5조원 이상 불어났다. 대주주인 국책은행이 엄청난 자금을 투입했는데도 필요한 돈은 기하급수로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대한민국 조선호는 침몰 중이었다.
삼성중공업이라고 해서 더 나아진 것은 없었다. 결국 삼성중공업은 2017년 말 다시 1조5천억원의 유상증자 카드를 꺼냈다. 대대적인 구조조정에도 적자 상황은 더욱 깊어져 갔고, 금융권도 자금지원의 문을 닫으려 하자 또다시 주주 계열사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최대 주주였던 삼성전자는 2천억원이 넘는 돈을 댔다. 삼성중공업은 이후 2021년에도 1조2천억원의 유상증자를 또 한다. 이렇게 회사가 망하지 않게 하려고 주주들은 세 번에 걸쳐 총 4조원에 가까운 돈을 댔다.
그러던 삼성중공업은 올해 2분기에 2천48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1년 만에 60% 가깝게 증가한 수치였다. 분기 기준으로 2천억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낸 것은 2014년 2분기 이후 11년 만이었다. 말 그대로 '격세지감'이다. 한화그룹에 넘어가 한화오션으로 이름을 바꾼 대우조선, 국내 최대 조선사인 HD현대중공업, 다시 뱃고동을 울리는 삼성중공업 등 조선 빅3는 새로운 역사를 향한 항해의 길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지난 10년간의 아픔은 과거가 됐다. 이제는 '마스가'(MASGA)라는 이름으로 미국 시장의 문도 열어젖히고 있다.
지난 10년간 지난하게 이어졌던 조선업 구조조정은 명확한 원칙을 정립했다. 구조조정은 늘 고통스럽다. 힘들면 누군가에게 손을 벌리고 싶어 하고, 부실에 대한 원인을 남 탓으로 돌리고 싶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시장 질서가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익을 사유화하고 손실을 사회화하는 약육강식의 방식과 다름없다. 하지만 조선업 구조조정은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조정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명확한 대원칙 속에서 이뤄져 왔다. 우선 대주주는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주주와 채권자, 종업원 등 모든 이해관계자는 고통 분담에 기꺼이 참여해야 한다. 최종 목표는 빚잔치가 아닌 지속 가능한 경영정상화여야 한다. 이 3가지 원칙 중 어느 하나라도 흔들리면 구조조정은 성공할 수 없다. 조선업 구조조정은 철저하게 이러한 3가지 원칙에 부합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대한민국의 시름을 깊게 했던 10년 전 조선업 불황과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이젠, 석유화학과 철강업종에서 다시 시작될 조짐이다. 중국의 거침없는 덤핑 공세와 중동 국가들의 석유화학 설비투자 확대 등으로 공급이 과잉 상태가 된 석유화학 시장은 이미 레드오션이 돼 버렸다. 한때 반도체에 맞먹는 수출 효자상품이었던 석유화학 제품들은 애물단지가 됐다.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는 상품과 산업이다. 각 기업은 자율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정부는 뒷받침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찌 될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기업 입장에서는 정부에 한없이 손을 벌리고 싶을 것이다. 조금만이라도 지원해주면 살아날 수 있다면서. 그런데 늘 구조조정이 벌어질 때마다 기업들을 그렇게 말해 왔다. 산소통만 달아주면 다시 벌떡 일어설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기 스스로 팔과 다리를 잘라내는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정부와 금융권의 입장은 명확하다. 구조조정 원칙대로 하라고. 그래야 시장도 동참해 준다. 이익은 혼자 챙기면서 손실을 같이 나누자는 염치없는 구조조정은 실패한다.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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