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3일부터 2주간 오랜만에 미국 출장길에 올랐다. 덜레스 공항에 내린 바로 다음날 미 국무성·상무성 각료, 상원의원 보좌관들과 면담을 했는데,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방문한 네바다 주 리노(Reno) 인근의 테슬라 기가팩토리 정문에서부터 느껴진 활기찬 에너지에 필자를 비롯한 방문단은 다소의 우울감을 던지고 공장 라인을 둘러보며 최신 모델 3, 모델 S, 그리고 사이버트럭도 몰아보는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기가팩토리 투어 담당 직원들은 '회장님' 즉, 일론 머스크의 비전에 깊이 감화돼 있었다. 작업복 차림의 생기 넘치는 젊은 백인 청년과 흑인 청년 두 명이 인솔했는데, 그들은 평생 네바다 주 카지노, 호텔에서 담배 연기를 마셔가며 시트를 빨고 설거지를 해 왔던 이 지역 청년들에게 회장님께서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를 주셨다며 그를 칭송했다. 그들은 알고보니 고등학교 중퇴였다. 2014년 처음 착공했을 때부터 그들은 자동차 생산라인 구축에 투입되어 수많은 공정을 옮겨다니면서 손수 노하우를 익히고, 승진도 해서 월급도 많다고 했다. 평균 연봉이 13만 달러, 비숙련 초임 연봉이 3-4만 달러 정도라고 하니 이들은 아마 지금 환율로 따지면 적어도 1억원에 가까운 돈을 받고 있지 않을까? 네바다는 주정부 소득세도 없다.

한국·일본 배터리 기업들을 긴장하게 할 만한 이야기도 소개했다. 실제 양산 라인에서 수많은 소형 배터리들을 배터리 팩에 꽂아 넣고 연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들은 보다 효율적인 배터리 설계와 배치 구조에 대해 연구하게 되었다고 했다. 지금은 파나소닉 배터리를 넣고 있지만 향후에는 테슬라에서 직접 개발한 규격의 배터리와 팩을 사용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필자는 설명을 듣다가 물었다. "지금 옆 동에 파나소닉이 입주해 있는데, 그들도 이걸 알고 있나요?" 청년은 대답했다. "우리 자동차에 들어가는 배터리는 우리가 제시하는 성능 기준과 품질, 가격을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수 있다면 우리 제품을 넣는 것이고, 배터리 공급사가 우리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다면 나중에 넣을 수도 있죠. 이제는 우리 것을 쓰려고 합니다."

중국의 추격이 두렵지 않느냐는 말에 두 청년은 앞다투어 "회장님은 오히려 테슬라의 비전에 많은 국가와 기업들이 동참하는 것이 산업 생태계 발전과 기후 변화 대응에 도움이 된다고 말씀하셨다"면서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좋은 자동차, 더 나은 모두의 미래를 위해 테슬라가 상징하는 비전을 향해 나아갈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미국의 산업·제조업 기반 부활에 대해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이 다소 많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이들은 삶의 새로운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가팩토리의 교훈은 세 가지였다. 첫째, 대규모 제조업 자본 투자는 분명 지역 사회의 활기를 되찾게 해준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에게 밝은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해준다는 것, 그들의 눈동자가 반짝인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는다. 둘째, 최종 제품 브랜드와 생산 능력이 갖는 영업이익 외의 힘이다. 실제 제조업체들의 이익률이 10% 미만이라 해도, 소재·부품·장비·SW 기술 기업의 생사 여탈권을 쥘 수 있다. 실제 수천만 인구가 구매하는 제품을 생산하는 현장에서부터, 부가가치 높은 근본적 기술 개발이 태동할 수 있다는 새삼스러운 발견이었다. 셋째, 존경할 만한 '회장님' 혹은, 기업의 존재 가치와 사명의 중요성이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이 다 그렇듯 타성에 젖고 시급만 생각하면 품질 개선이라든지, 새로운 제품과 기술 개발의 동력은 약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 임직원이 공명(共鳴)할 수 있는 비전이 바로 선다면, 같은 조직이라도 새로운 것을 잉태할 수 있는 생명력이 깃들게 된다.

재미있는 투어가 끝나고 나니, 다시 조금 우울해졌다. 앞으로 한국에는 기가팩토리 같은 공장들이 많이 들어설 수 있을까? 인구가 소멸하는 지역 도시들에 다시 청년들이 돌아오고, 인공지능과 우주의 꿈을 꾸며 더 나은 삶을 향한 기대에 부풀어 힘차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천 조 원이 넘는 돈을 미국에 퍼주고, 어떻게든 관세율을 깎아보려 별로 이야기를 섞고 싶지도 않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항복'한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된다. 수출 제조 기업들이 꺾이고 문을 닫는 순간, 기가팩토리의 감동과는 정반대로 기나긴 고통의 세월이 예상되기 때문이리라.

모든 직원들이 그렇진 않겠지만, 인류의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간다는 머스크의 비전이 마치 종교처럼 퍼져 열성신도(Zealot)들이 자신을 갈아넣는 모습을 보면서 그 옛날 "해봤어?"라고 독려하던 회장님들의 시대를 떠올리게 된다. 시에라 고원의 황무지 한가운데 웬 전기차 공장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어떠한 역경이라도 극복하고 위대한 성취를 이루겠다는 공동의 신념을, 한국은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이유는 어쩌면 다른 무엇보다도, 비전과 정신력의 부재일지도 모르겠다.

(경희권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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